무진의 안개보다 서늘했던 침묵,내 아이의 등굣길이 걱정되어 다시 꺼내본 영화 '도가니' 비가 내리기 직전, 공기가 눅눅하게 피부를 감쌀 때면 저는 습관적으로 아이를 살피게 됩니다. 영화 〈도가니〉를 처음 보았던 날, 제 코끝을 찔렀던 건 낡은 학교 복도의 습한 콘크리트 냄새와 그 속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를 지켜줘야 할 부모가 되어 다시 본 이 영화는, 억지로 외면해왔던 우리 사회의 비릿한 구석을 기어이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자욱한 안개로 둘러싸인 도시 무진의 청각장애인 학교 '자애학원'에 미술 교사 인호(공유)가 부임하며 시작됩니다. 인호가 처음 학교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환대가 아니었습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나요?울산에서 자란 내가 다시 만난 1981년 부산의 기억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울산 성남동 시장통을 지나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남포동에 가곤 했습니다. 자갈치 시장의 비릿한 바다 냄새와 뜨겁게 김이 서린 돼지국밥집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투박한 사투리들... 영화 〈변호인〉을 보는데 자꾸만 그때 그 1981년의 공기가 코끝을 스치더라고요. 사실 어릴 땐 몰랐습니다. 평범한 아저씨들이 먹던 그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이,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약속의 장소였고 또 누군가에겐 짓밟힌 진실을 붙잡는 마지막 보루였다는 것을요. 영화는 1980년대 초반 부산, 고졸 출신의 돈 없고 빽 없는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의 이야기로 문..
식어버린 두 번째 도시락과 밤 10시의 공기,79년생인 우리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를 다시 보는 이유 어제 밤, OTT 리스트를 뒤적이다 1989년작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꺼냈습니다. 화면 속 웰튼 아카데미의 엄격한 교정을 보는데, 갑자기 1997년 고등학교 교실 냄새가 확 끼치더군요. 쉬는 시간마다 삐삐 사서함을 확인하러 공중전화로 뛰어가고, 두 번째 도시락의 식은 밥을 꾸역꾸역 삼키며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견디던 그 시절 말이죠. 그때 우린 학교에서 영화 한 편 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대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 칸에 나란히 앉아 있었을 뿐이죠. 40대 중반이 된 지금, 2026년의 더 치열해진 입시 지옥을 사는 내 아이 곁에..
"아빠, 아빠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길을 잃은 가장에게 영화 어바웃 타임이 들려준 답신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내가 짊어진 '가장'이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기보다는 그저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싶은 그런 날요. 저는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하늘을 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리죠. "아빠, 아빠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겠어요? 제발 길 좀 알려주세요." 오늘 소개할 영화 〈어바웃 타임〉은 저처럼 아빠의 빈자리를 그리움으로 채우며 사는 모든 어른 아이들에게, 하늘에서 날아온 다정한 답장 같은 작품입니다.영화의 주인공 팀(도널 루슨)은 21살이 되던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가문의 놀라운 비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