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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더 플랫폼 (계단과 수직 감옥, 음식의 분배, 계급 결말)

무비 러버 2025. 11. 4. 21:28

목차


                영화 「기생충」 공식 포스터 / 출처: [CJ ENM]                                  영화 「더 플랫폼」 포스터 / 출처: [Netflix]

     

     

    ※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과 「더 플랫폼」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에는 계급의 위와 아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 두 편이 나왔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입니다. 「기생충」이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반지하와 대저택을 통해 불평등을 보여준다면, 「더 플랫폼」은 음식이 위층부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수직 감옥을 이용해 같은 문제를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소비하고 끝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기생충」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가족이 결국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과정이 씁쓸했고, 「더 플랫폼」은 굶주린 사람들이 남은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서로를 먹으려는 장면이 잔인해서 더 큰 충격을 줬습니다.

    특히 「더 플랫폼」에서 음식이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먹을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보기 불편했습니다. 위층 사람들에게는 넘쳐나는 만찬이지만 아래층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짓밟고 훼손한 음식조차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같은 플랫폼을 바라보는데도 어느 층에 배정됐느냐에 따라 그것이 잔치상이 되기도 하고 빈 식탁이 되기도 합니다.

    두 영화의 결말도 오래 남았습니다. 「기생충」에서는 기우가 돈을 벌어 박 사장의 집을 사고 지하에 숨어 있는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더 플랫폼」에서는 고렝이 가장 아래인 333층에서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메시지로 삼아 위로 올려 보냅니다. 두 사람 모두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한 계획과 메시지를 선택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실제 변화를 만들었는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생충」은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이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받았습니다. 「더 플랫폼」은 같은 해 제작된 스페인 영화로, 현재 넷플릭스 공식 페이지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출처: CJ ENM 「기생충」 작품 정보, 칸영화제 「기생충」 수상 정보, 넷플릭스 「더 플랫폼」 공식 작품 정보

    계단과 수직 감옥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은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 삽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의 다리와 술에 취한 사람이 노상 방뇨하는 모습입니다. 무료 와이파이를 찾아 집 안을 돌아다니고, 피자 상자를 접는 일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법니다.

    반면 박 사장 가족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넓은 저택에서 살아갑니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거실 앞에는 잘 관리된 잔디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같은 도시에 있지만 기택 가족의 반지하와 박 사장 가족의 집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입니다.

    기우가 과외 교사로 박 사장의 집에 들어가면서 기택 가족에게 위로 올라갈 기회가 생깁니다. 기우는 여동생 기정을 미술 선생님으로 소개하고, 기정은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이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처음에는 가족이 힘을 합쳐 취업에 성공하는 과정이 유쾌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리를 얻기 위해 기존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 문광을 밀어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냥 통쾌하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난한 가족이 부자를 직접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일하던 사람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박 사장의 집 지하에 문광의 남편 근세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집의 구조는 더 복잡해집니다. 언덕 위 저택 아래에는 반지하보다 더 깊고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기택 가족은 자신들이 가장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계단을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의 집으로 향할 때는 계속 위로 올라가고, 폭우가 쏟아진 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수많은 계단을 내려갑니다. 부잣집의 비는 다음 날 정원을 깨끗하게 만든 날씨지만,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잠기게 만든 재난입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기택 가족이 잠시 잊고 있던 현실도 다시 나타납니다. 박 사장의 집에서 술과 음식을 즐길 때는 그 공간을 차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집주인이 돌아오자 가족은 테이블과 침대 밑에 숨습니다. 결국 저택에서 빠져나와 빗속의 계단을 내려가 침수된 반지하로 돌아갑니다.

    「더 플랫폼」은 계급의 높이를 더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렝이 눈을 뜬 곳은 가운데가 뚫린 수직 시설의 48층입니다. 각 층에는 두 사람이 생활하고, 하루에 한 번 음식이 실린 플랫폼이 맨 위에서 아래로 내려갑니다.

    시설의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는 막힌 문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구멍을 통해 서로를 내려다보고 위층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층의 요구는 위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위층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아래층 사람은 위에서 남겨준 것만 받아야 합니다.

    「기생충」의 계단이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계급의 거리라면 「더 플랫폼」의 수직 감옥은 불평등을 극단적으로 압축한 공간입니다. 두 영화 모두 위로 올라가는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누가 어느 위치에 있을지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음식의 분배가 보여준 생존 방식

     

    두 작품에서 음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소품이 아닙니다. 누가 충분히 먹고 누가 남은 것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계급의 기준입니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 가족은 값비싼 음식을 자연스럽게 누립니다.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가사도우미에게 짜파구리를 준비해달라고 하고, 그 음식에는 한우 채끝살이 들어갑니다. 서민적인 인스턴트 음식과 비싼 고기가 한 그릇 안에 섞이는 모습은 부유한 가족의 소비방식을 보여줍니다.

    기택 가족에게 음식은 노동과 생존에 가깝습니다. 반지하에서 피자 상자를 접고, 박 사장 가족이 떠난 집에서는 남겨진 술과 음식을 꺼내 먹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의 집에서 당연하게 누리고, 누군가는 집주인이 없는 시간에 몰래 즐겨야 합니다.

    「더 플랫폼」은 이 차이를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게 표현합니다. 맨 위의 주방에서는 요리사들이 고급 재료로 정교한 음식을 만듭니다. 처음 플랫폼에 오른 음식은 아름답게 차려진 만찬입니다. 그러나 위층 사람들이 욕심껏 먹고 밟고 훼손하면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형태를 잃습니다.

    고렝이 처음 머무는 48층에서는 어느 정도 먹을 것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달 171층에 배정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음식은 그 층까지 거의 내려오지 않고, 함께 배정된 트리마가시는 고렝을 묶어 조금씩 잘라먹으며 살아남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 장면은 「더 플랫폼」에서 가장 충격적인 설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람이 원래 잔인해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만 말하기에는 그들이 놓인 환경이 너무 극단적입니다. 그렇다고 굶주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먹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영화는 구조가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내린 선택의 책임을 완전히 지워주지 않습니다.

     

    시설의 전직 행정 직원인 이모기리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아래층까지 음식이 전달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래층 사람들에게 조금만 먹으라고 부탁해도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위층 사람들은 자신도 다음 달에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재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음식의 총량이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는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가 정확한 음식량과 수용 인원을 계산해 증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기리가 자발적인 연대를 기대하지만, 층마다 분리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기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렝과 바하랏은 말로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플랫폼을 타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위층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주지 않고, 아래층으로 갈수록 정해진 양을 나눠주려고 합니다. 이들은 판나코타 하나를 온전하게 남겨 위의 관리자들에게 메시지로 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려는 과정에서도 폭력이 발생합니다. 고렝과 바흐랑은 협조하지 않는 사람을 위협하고 공격합니다. 불평등한 질서를 바꾸려는 행동이 또 다른 강제와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기생충」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합니다.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는 모두 박 사장의 집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돕는 대신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웁니다. 두 작품 모두 불공정한 구조가 사람들을 경쟁자로 만들고, 그 경쟁 속에서 가장 약한 사람부터 밀려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냄새와 남은 음식이 만든 경계

     

    「기생충」에서 계급을 가장 잔인하게 드러내는 것은 돈이나 집뿐만 아니라 냄새입니다. 기택 가족은 다른 옷을 입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박 사장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다송은 네 사람에게서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 냄새는 반지하라는 생활공간에서 몸에 밴 흔적입니다. 기택 가족이 말투와 직업, 이력을 바꿔도 냄새까지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습니다. 박 사장은 기택의 냄새가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말하며 불쾌해합니다.

    기택이 가장 크게 흔들리는 순간도 박 사장이 냄새를 피하려고 코를 막는 장면입니다. 박 사장은 기택의 가족이 겪은 일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불쾌하다고 느끼는 냄새에 먼저 반응합니다. 그 행동은 박 사장이 강조하던 ‘선’을 냄새로 다시 긋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플랫폼」에는 냄새 대신 훼손된 음식이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위층 사람들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고른 뒤 남은 음식에 침을 뱉거나 발을 올립니다. 아래층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모든 층을 지나지만 같은 상태로 도착하지 않습니다. 위층 사람에게 음식은 선택의 대상이고 아래층 사람에게는 존엄을 포기하고서라도 붙잡아야 하는 생존 수단입니다. 무엇을 먹는가 보다 어떤 상태의 음식을 받아야 하는지가 그 사람의 위치를 보여줍니다.

    두 영화의 차이도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기생충」의 계급 차이는 일상 속에 숨어 있습니다. 냄새, 계단, 창문, 비처럼 평범한 것들이 인물의 위치를 드러냅니다. 반면 「더 플랫폼」은 음식과 굶주림, 인육이라는 극단적인 이미지를 사용해 관객이 불평등을 외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나에게 더 직접적인 충격을 준 작품은 「더 플랫폼」이었습니다. 「기생충」은 현실과 가까워서 씁쓸했지만, 「더 플랫폼」은 음식이 망가지고 사람들이 굶주리며 서로를 먹으려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단순히 계급 문제를 이해하게 하기보다 몸으로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다만 표현이 강한 만큼 호불호도 클 것 같습니다. 음식물이 훼손되는 모습과 인육을 먹는 장면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자원의 분배와 인간의 선택을 생각해보고 싶다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두 계급 결말이 남긴 계획과 메시지

     

    「기생충」과 「더 플랫폼」은 모두 현재의 상황을 바꾸려는 행동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실제로 성공하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생충」의 마지막에서 기택은 박 사장을 죽인 뒤 저택의 지하 공간에 숨어 살아갑니다. 기우는 아버지가 보내는 모스부호를 알아보고 언젠가 돈을 벌어 그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이 집을 산 뒤 아버지가 지하에서 계단을 올라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우의 상상 속에서는 계획이 실현됩니다. 햇빛이 비치는 정원에서 기우와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기택은 지하에서 나와 가족과 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화면은 곧 반지하에 앉아 편지를 쓰는 기우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기우가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를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희망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그 계획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기우가 그 저택을 살 만큼 돈을 벌어야만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조건 자체가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우가 그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시간을 현실적인 평균소득에 대입하면 수백 년이 걸릴 수 있다는 취지로 결말의 막막함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영화가 기우의 미래를 확정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다시 반지하를 보여주는 이유는 그의 계획을 단순한 성공 예고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합니다.

    「더 플랫폼」에서 고렝과 바하랏은 판나코타를 관리자들에게 보낼 메시지로 정합니다. 음식 하나가 손대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면 아래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연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333층에 도착하면서 계획은 바뀝니다. 그곳에는 시설에 존재해서는 안 될 어린아이가 숨어 있습니다. 고렝과 바흐랑은 보호하려던 판나코타를 아이에게 먹이고, 판나코타 대신 아이 자체를 메시지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결말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실제로 시설의 가장 위까지 올라갔는지, 관리자들이 아이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고렝은 아이와 함께 올라가지 않고 어둠 속에 남습니다. 메시지는 전달자가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아이만 플랫폼에 태워 위로 보냅니다.

    나는 마지막 333층에서 아이를 발견하고 메시지로 올려보내는 장면이 「더 플랫폼」에서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일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장 아래층에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설의 질서 자체가 처음부터 거짓이거나 실패했다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아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희망과 연대의 가능성으로 볼 수도 있고, 관리자들이 감추고 싶었던 현실의 증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고렝의 희생으로 아이가 위에 도착해 변화를 만든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실제 변화가 일어났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두 결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우는 돈을 벌어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고렝은 아이를 위로 보내 메시지를 전달하려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아래에 있는 사람을 위로 올리거나 구하려 하지만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기우는 기존 질서 안에서 돈을 벌어 집을 소유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고렝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시설이 감춘 존재를 위로 보내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한 사람은 구조가 요구하는 성공을 이루려 하고, 다른 사람은 구조에 충격을 줄 메시지를 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성공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기생충」은 기우를 다시 반지하로 돌려보내고, 「더 플랫폼」은 아이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에서 이야기를 멈춥니다. 희망처럼 보이는 계획과 메시지가 남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구조가 있습니다.

    재미보다 씁쓸함이 남은 두 영화

     

    두 영화를 비교하고 나니 계급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사람들이 아래로 밀려나는 과정은 비슷했습니다. 「기생충」은 현실적인 집과 일자리, 냄새를 이용하고 「더 플랫폼」은 수직 감옥과 음식, 굶주림을 이용합니다.

    「기생충」에서는 부유한 가족이 직접 기택 가족을 굶기거나 지하에 가두지 않습니다. 박 사장 가족은 자신들이 고용한 사람들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더 플랫폼」에서는 관리자들이 각 층에 직접 찾아가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음식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합니다. 위치는 매달 바뀌지만 사람들은 위층에 배정됐을 때 아래층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두 작품 모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단순하게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기택 가족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노동자를 밀어내고, 「더 플랫폼」의 수감자들은 자신이 위층에 있을 때 아랫사람의 굶주림을 외면합니다. 불공정한 구조는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도 만듭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개인의 이기심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반지하 가족들이 안정적인 일을 구하기 어렵고, 수감자들이 어느 층에 배정될지 선택할 수 없는 구조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는 시스템과 인간 중 하나만 문제라고 말하기보다 불공정한 구조가 사람의 선택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생충」은 우리와 가까운 생활공간을 이용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씁쓸함이 컸습니다. 반지하와 대저택, 폭우와 냄새는 영화 밖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차이입니다. 기우가 계획을 세워도 다시 반지하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은 노력만으로 계급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흔듭니다.

     

    「더 플랫폼」은 그 문제를 훨씬 잔인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굶주림과 음식 장면이 강해서 두 작품 중 더 충격적으로 남았습니다. 먹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 어느 층에 있느냐에 따라 권력과 폭력으로 바뀌는 과정이 불편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재미보다는 씁쓸함과 불편함이 더 크게 남았습니다. 「기생충」의 기우에게는 계획이 있고 「더 플랫폼」의 고렝에게는 메시지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을 실현할 기회를 갖는 것은 다릅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위에 있는 사람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도 다릅니다. 두 영화가 결말 이후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도 관객에게 쉬운 희망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영화가 정답으로 확인한 의미가 아니라 두 결말을 비교하며 내가 받아들인 해석입니다.

    「기생충」과 「더 플랫폼」을 함께 본다면 어느 작품이 불평등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고르기보다, 내가 위층에 있을 때 아래를 생각할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지금 아래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화면 속 부자나 수감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조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면서도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기는 어려운 마음, 언젠가 올라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현재의 경쟁을 견디는 모습이 영화 밖의 현실과도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