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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노트

조커 (계단 춤과 냉장고, 호아킨 피닉스, 불편한 공감, 아서 플렉 결말)

무비 러버 2025. 11. 24. 12:32

목차


    영화 「조커」 공식 포스터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제공·배급: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이 글에는 영화 「조커」의 주요 장면과 결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서 플렉은 즐거울 때보다 곤란하거나 고통스러울 때 더 자주 웃습니다. 거리에서 폭행당한 뒤에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야 할 때도 웃음이 터집니다. 그는 웃음을 멈추려고 목을 움켜쥐고 몸을 구부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입니다.

    기존 글에서는 아서의 웃음을 ‘신경학적 질환으로 인한 발작성 웃음’이라고 단정했지만, 영화는 정확한 질환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아서가 가지고 다니는 카드에는 갑작스럽고 잦은 웃음을 유발하는 의학적 상태가 있으며, 그 웃음이 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질환으로 진단하기보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기 어려운 웃음’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에 압도됐습니다. 아서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그가 저지른 폭력에 공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부딪혔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며 춤추는 모습은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가 찾아낸 자유가 살인 이후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껏 해방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배트맨의 숙적으로 알려진 조커를 그대로 옮긴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닙니다. 코미디언을 꿈꾸던 아서 플렉이 고담시에서 조커라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인물 중심의 심리극입니다. 감독은 공식 제작 자료에서 정해진 기원이 없는 조커의 복잡성을 탐구하고 싶었으며, ‘조커의 이야기’보다 한 사람이 ‘조커가 되어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출처: 「조커」 제작 자료

    계단 춤과 냉장고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계단 춤과 냉장고 장면이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아서가 세상과 단절돼 가는 상태를 대사보다 몸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같은 고립을 표현하면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서는 어느 날 냉장고 안에 있던 물건들을 바닥으로 꺼낸 뒤 몸을 구겨 넣고 문을 닫습니다. 영화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것인지, 세상의 소리와 빛을 차단하려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좁은 공간에 가두려는 것인지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냉장고 안에 들어가는 행동 자체보다 아무도 그의 이상 행동을 보거나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습니다. 아서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나눌 사람은 없습니다. 상담사는 정해진 질문을 반복하고, 직장 동료들은 그를 놀리거나 이용합니다. 이웃 소피와 가까워졌다고 믿었던 순간들마저 상당 부분 아서의 상상이었습니다.

    냉장고 장면은 원래 각본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촬영감독 로런스 셔의 설명에 따르면 호아킨 피닉스가 촬영 도중 즉흥적으로 냉장고 안에 들어갔고, 제작진도 그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장면의 정확한 의미를 배우나 감독이 하나의 답으로 확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서가 죽으려고 들어갔다’ 거나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주장은 가능한 해석일 뿐, 영화가 확인해 준 사실은 아닙니다. 출처: IndieWire 냉장고 장면 촬영 비화

    계단 춤은 냉장고 장면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냉장고 안의 아서는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지만, 계단 위의 조커는 화려한 옷과 화장을 하고 몸을 크게 펼칩니다. 그는 음악에 맞춰 팔을 흔들고 계단을 내려오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 아서는 같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갑니다. 몸은 앞으로 기울어 있고 발걸음에는 힘이 없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돌보고, 코미디언의 꿈을 붙잡으며,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버티는 움직임처럼 보였습니다. 반면 후반의 아서는 계단을 내려옵니다. 올라갈 때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회복이 아니라 폭력과 파괴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단 춤을 보며 해방감과 광기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아서가 더는 억지로 웃음을 참거나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뒤 얻은 것이라는 점에서는 결코 통쾌하게만 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음악과 춤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면서도 그 장면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호아킨 피닉스

     

    「조커」를 특별하게 만든 가장 큰 힘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였습니다. 아서의 상태는 대사보다 몸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뼈가 선명하게 보이는 등과 구부정한 어깨, 일정하지 않은 걸음걸이, 갑자기 터지는 웃음을 억누르려는 목의 움직임이 인물의 불안과 고통을 보여줍니다.

    피닉스는 이 역할을 위해 52파운드를 감량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52파운드에 1파운드당 약 0.4536kg을 곱하면 약 23.6kg이므로, 국내 기사에서 흔히 언급되는 ‘약 24kg 감량’과 거의 같습니다. 다만 배우의 큰 폭 체중 감량은 의료진의 관리 아래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반인이 연기 준비 사례를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출처: Vanity Fair 호아킨 피닉스 인터뷰

    마른 몸은 아서가 처한 환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만 체중 감량만으로 이 연기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버스에서 아이를 웃겨주다가 아이의 어머니에게 제지당했을 때, 아서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웃음이 터지며 상황은 더 나빠집니다. 피닉스는 웃음과 울음의 경계를 흐려 아서의 감정을 한쪽으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아서가 거울 앞에서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얼굴에는 웃는 모양이 만들어지지만 눈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습니다. 광대라는 직업은 사람을 웃게 해야 하고 어머니는 그에게 세상에 웃음과 기쁨을 전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아서는 웃는 표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코미디 클럽에서 다른 사람들과 박자가 맞지 않게 웃는 장면에서는 아서가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을 따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도 코미디언이 될 수 있다고 믿지만, 농담이 왜 재미있는지보다 사람들이 언제 웃는지를 먼저 관찰합니다. 이 어긋난 반응이 나중에 머레이의 방송에 출연했을 때 더욱 불안한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피닉스의 연기는 아서를 선량한 피해자로만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 처음 총을 쏜 뒤 화장실에서 춤추는 장면부터 그의 몸에는 이전과 다른 침착함이 생깁니다. 두려움과 혼란만 표현했다면 관객이 아서를 일방적인 희생자로 받아들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닉스는 폭력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듯한 만족감까지 보여줍니다. 그 순간부터 아서를 향한 연민에는 경계심이 함께 따라붙습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작품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음악을 맡은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도 음악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평가가 아니라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공개한 공식 수상 결과입니다. 출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제92회 시상식 결과

    불편한 공감

     

    저는 영화를 보면서 아서에게 동정심을 느껴도 되는지 실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폭행당하고, 직장에서는 해고당하며, 상담과 약물 지원마저 중단됩니다. 코미디언이라는 꿈은 머레이의 방송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자신이 믿었던 가족의 과거도 무너집니다. 이런 일을 겪는 인물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서가 겪은 고통이 그가 저지른 살인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지하철에서 자신을 공격한 남자들에게 총을 쏜 첫 상황과 달리, 도망가는 사람을 뒤쫓아가 다시 총을 쏘는 행동은 단순한 방어로 보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페니와 직장 동료 랜들, 방송 진행자 머레이를 살해한 행동에도 정당방위라는 설명을 붙일 수 없습니다.

    기존 글에서는 영화가 ‘사회가 아서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쪽에 무게를 둔다고 적었습니다. 어느 정도 가능한 해석이지만 그것을 영화의 확정된 결론으로 표현하면 아서 개인의 선택이 지워질 수 있습니다. 영화는 복지 축소와 빈부격차, 조롱과 방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서가 점차 폭력을 선택하고 그 행동에서 만족을 얻는 과정도 보여줍니다.

    따라서 아서의 변화는 사회 탓이나 개인 탓 가운데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의 방치는 그를 더 깊이 고립시켰지만 모든 고립된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폭력성과 직접 연결해서도 안 됩니다. 「조커」는 특정 정신질환을 정확하게 묘사한 의학 영화가 아니며, 아서라는 허구의 인물이 폭력적인 악당으로 변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영화의 감정적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오랫동안 아서의 시선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가 무시당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화가 나고, 머레이에게 조롱당할 때는 수치심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아서가 폭력을 저지르면 그 행동을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저는 조커에게 공감했다기보다 아서가 무너지는 과정에 감정이 끌려갔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폭력을 응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더 일찍 도움을 받고 누군가와 제대로 연결됐다면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동시에 타인의 무관심이 범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하거나, 사회가 외면한 사람의 폭력은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장점은 바로 이 불편함을 쉽게 해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서를 완전한 피해자로 생각하려는 순간 그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악인으로만 밀어내려는 순간에는 그가 당한 모욕과 고립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어느 한쪽에 편하게 서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조커」가 단순한 악당의 탄생기를 넘어서는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아서가 겪는 불행이 너무 집중적으로 배치돼 관객의 연민을 의도적으로 끌어낸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직업과 상담, 가족관계와 꿈이 차례로 무너지고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잔인합니다. 사회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인물과 세상이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구성됐다는 인상도 남았습니다.

    아서 플렉 결말

     

    아서가 머레이의 생방송에 출연하는 장면은 그가 아서 플렉에서 조커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조커라고 소개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그 이름은 머레이가 아서의 코미디 영상을 조롱하면서 붙인 것이었습니다. 아서는 자신을 모욕한 이름을 오히려 새로운 정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생방송에서 아서는 지하철 살인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밝힙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적 지도자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운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고담의 시위대는 광대 가면을 쓰고 그를 상징으로 받아들입니다. 개인적인 분노와 살인이 사회적 저항의 상징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아서가 머레이를 살해한 뒤 고담은 폭동에 휩싸입니다. 경찰차에 실려 가던 그는 시위대에 의해 구출되고, 자동차 위에서 피로 미소를 그린 채 군중의 환호를 받습니다. 영화 초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결말에서는 도시 전체의 시선을 받습니다. 아서가 평생 원했던 관심을 얻는 순간이지만, 그 관심은 코미디가 아닌 살인과 혼란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아서의 승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아서는 자신을 억누르던 시선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존재가 됐습니다. 군중은 그의 실제 사정과 범행의 구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분노의 상징으로 소비합니다. 아서 역시 군중의 고통을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분노가 조커라는 얼굴 아래 잠시 결합했을 뿐입니다.

    마지막 상담 장면에서 아서는 상담사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상담사가 무엇이 재미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해하지 못할 농담을 생각했다고 답합니다. 이어 어린 브루스 웨인이 부모의 시신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짧게 제시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서가 정확히 어떤 농담을 떠올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 때문에 영화 전체가 아서의 상상이었는지, 마지막 상담만 현재 시점인지, 앞선 사건 가운데 일부가 왜곡된 기억인지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소피와의 관계가 아서의 상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의 시선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영화의 모든 사건이 상상이었다고 확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결말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어디까지가 아서가 구성한 이야기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조커」는 사회가 외면한 사람이 악인이 됐다는 단순한 교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서가 받은 상처와 사회의 방치를 보여주지만, 그의 선택에 따른 책임까지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서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그의 폭력에는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생긴다는 사실이 불편했습니다.

    계단 춤은 해방과 광기로 함께 보였고, 냉장고 장면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고립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호아킨 피닉스는 아서의 웃음과 울음, 초라함과 잔혹함을 하나의 몸 안에 담았습니다. 영화를 본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조커의 화려한 분장이 아니라 웃음을 멈추려고 목을 붙잡던 아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아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이 그에게 감정적으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폭력을 목격하게 만들어 공감의 한계가 어디인지 묻는 작품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커」는 재미있었다는 말만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배우의 연기에는 압도됐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제가 왜 아서를 안쓰럽게 바라봤는지 계속 생각하게 됐습니다.